
지난 해, 시계 보관함의 방 하나가 비워졌다가 다시 채워졌다. 떠난 건 모나코였고, 찾아온 것 역시 모나코였다. 맞다. 같은 모델을 굳이 또 들인 거다. 이별과 만남은 대략 4개월의 시차를 두고 이뤄졌다. 의도치 않게 ‘방출’이 아닌 ‘기변’이 되었지만 이 또한 익숙한 일이다. 벌써 네 번째 모나코. 이번에 찾아온 손님은 2024년 9월 출시된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레이싱 그린 모델이다. 칼리버 11을 탑재한 복각 모나코를 새롭게 변주한 것으로, 샌드 블라스트 처리한 티타늄 케이스에 실버 선버스트 다이얼과 그린 서브 다이얼, 그리고 옐로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를 조합했다. 레이싱 워치답게 스트랩은 펀칭 처리한 그린 소가죽 스트랩을 매칭했는데, 스트랩 뒷면에 옐로 컬러 러버 소재를 덧대어 전형적인 ‘브리티시 레이싱 그린’ 테마를 구현했다. 이 옐로 러버 소재는 착용할 땐 보이지 않지만 시계를 벗어두면 꽤 멋진 감상 포인트가 된다.
어떤 시계인들 그렇지 않겠냐만 이 모델 역시 구매하기까지 고민을 굉장히 많이 했던 모델이다. 일단 티타늄 모델인 것을 감안하더라도 가격이 너무 비쌌다. 지난 해 9월 출시 당시 1,364만 원의 가격표가 붙었는데, 올해 1월 브랜드 전체 가격을 인상하면서 기어이 1,400만 원을 넘겼다. 참고로 지난 해 구매한 블랑팡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38mm 모델이 현재 정가 기준으로 1,463만 원이다. 여러 시계를 놓고 고민하는 것이라면 다른 걸 사면 그만이지만 모나코의 경우에는 대체로 대체재가 없는 편이다. 돌이켜보면 그동안 모나코는 ‘어떤 걸 살까’의 문제가 아니라 ‘사느냐 마느냐’의 문제였다. 그렇게 며칠을 고민한 끝에, 이제부터 썰을 풀 여러 근거를 토대로 자신을 설득시키며, 겨우 지름의 계곡을 통과할 수 있었다. 또 다른 자아가 쏟아내는 궤변에 100퍼센트 동의하진 않았지만 못이긴 척 수긍해줬다. 경험상 모나코 한정판은 꽤 빠르게 눈앞에서 사라지니까.
네 번째 모나코를 얘기하기 전에 일단 그동안 스쳐갔던 세 개의 모나코 이야기부터 해야겠다. 특히 첫 번째 모나코는 소재와 컬러를 제외하면 네 번째 모나코와 완전히 똑같은 녀석이니 말이다. 같은 걸 왜 또 샀냐는 얘기가 벌써부터 들려오는 것 같다.
모나코는 내가 구입한 첫 번째 스위스 시계다. 게다가 처음으로 구입한 새 제품이기도 했다. 모나코가 집에 도착했던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자동차를 제외하면 난생 처음으로 수백 만 원짜리 물건을 구입했으니 기억이 안 날 수가 없다. 빈티지한 베이지 컬러 가죽 케이스에는 ‘HEUER’라는 붉은색 인장이 찍혀 있었고, 그 안에는 짙은 청색 다이얼의 사각 시계가 빛나고 있었다. 그건 그때까지 내가 보았던 사각 형태의 물질 중에 가장 미학적으로 뛰어난 물건이었다. 적어도 모나코에 영혼을 빼앗긴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수많은 시계 중에 왜 하필 모나코였을까? 기계식 시계 입문자로서 ‘태그호이어’라는 브랜드에 막연한 동경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입문용 아쿠아레이서를 선택하지 않고, 자금을 더 쏟아 부어 모나코를 선택했냐고 묻는다면, 당시 모터사이클에 심취했던 내 속도 지향의 삶 때문이라고 답하겠다. 영화 <르망>에서 레이싱 슈트를 입은 스티브 맥퀸이 모나코를 착용한 모습은 내 욕망의 가속 페달을 밟는 이유로 충분했다. ‘이걸 착용하고 체리(당시 애마였던 레드 컬러 두카티 멀티스트라다의 애칭)와 함께 전국일주를 떠나야겠다’ 그런 상상과 망상 사이 어디쯤에 있는 꿈을 꾸며 모나코의 역사와 주요 모델을 정신없이 검색했다. 사각형의 유니크한 디자인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종류의 물건을 구입하는 사람은 대개 ‘남과 다른 나만의 개성’을 추구한다. 그럼에도 대중의 취향에서 너무 동떨어져서는 안된다. 평범한 직장인의 첫 시계라면 더욱 그래야 한다. 이를 테면 대중성과 개성 사이에서 절묘하게 줄타기를 해야 하는데, 사각 형태의 모나코는 그런 내게 아주 적당한 완충지대였다.
원래 마음에 들었던 건 크라운이 오른쪽에 있는 좀 더 정제된 형태의 칼리버 12 모델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1969년 오리지널 모나코를 재현한 칼리버 11 모델로 마음이 기울었다. 모나코의 과거에 너무 심취했던 탓일까? 사각형 케이스만으로도 충분히 유니크했지만 왼쪽에 위치한 크라운, 과거 칼리버 11의 흔적이 그 맛을 보다 농후하게 만들어준다고 생각했다. 비록 뷰렌의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한 옛 칼리버 11과 전혀 다른, 셀리타 기반의 유사 엔진이지만 왼쪽에 배치된 크라운은 그 탄생의 역사를 공유하기에 충분했다. 뒤부아 데프라에서 제작한 크로노그래프 모듈도 그 시절의 협업 역사를 어느 정도 반영하고 있다며 셀프 최면도 걸었다. 무광 다이얼을 선호했던 당시의 취향도 칼리버 11 모델 선택에 한몫 했던 것 같다. 마치 오래된 청바지를 연상시키는 매트한 블루 다이얼, 오팔린 마감 처리한 실버 서브 다이얼, 레드 컬러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의 조합은 그 자체로 완벽한 빈티지였다.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수평 인덱스까지.
수년 동안 모나코 칼리버 11은 데일리 워치로 맹활약했다. (근육 손실이 찾아온 지금은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당시 베스파 PX125를 타고 다녔는데, 검증된 셀리타 기반의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는 올드스쿨 바이크의 진동에도 잘 견뎠고, 가끔 만났던 여름날의 폭우 속에서도 완벽한 방수 성능을 자랑했다. 헬맷을 쓰고 스티브 맥퀸을 흉내내며 포르쉐가 아닌 베스파와 함께 사진을 찍었던 일이 기억에 남는다. 올리브 그린 컬러의 벨스타프 자켓과도 궁합이 좋았던 것 같다. 빛바랜 그린 컬러, 매트한 블루 다이얼, 그리고 레드 컬러의 조합이 꽤 근사했다. 블루 다이얼에 빛이 강하게 쏟아지면 마치 해변의 모래처럼 잠깐 반짝이다가, 빛이 물러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진중해졌다. 늘 칙칙하고 우울하다가 아주 잠깐 밝아진다는 점에서도 주인을 썩 닮았다.
온갖 환경에서 데일리 워치로 구르면서 사각 스틸 케이스는 천천히 시간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러그가 찍히고, 폴리싱 된 표면에는 이런저런 스크래치가 생겼다. 그래도 툭 튀어나온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가 꽤 외부 충격을 방어해줘서 전반적으로 컨디션은 양호했다.단단했던 펀칭 소가죽 스트랩도 어느새 부드러워졌다. 미세하게 갈라진 가죽의 결 사이로 진한 시간의 향이 흘렀다. 그렇게 시계는 계속 나이를 먹었지만 결코 남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낡아갈수록 1969년 오리지널 모델에 조금씩 근접해가는 느낌이었다. 시계가 자기가 태어났던 시간을 향해 달려간다는 감각이랄까. 그 느린 역주행 레이싱을 관람하는 것이 마냥 좋았다.
첫 번째 모나코를 구입하고 4년이 흘러, 마침내 모나코의 세대교체가 이뤄졌다. 가장 큰 변화는 무브먼트였다. 인하우스 호이어 02 무브먼트가 탑재되어 파워 리저브가 80시간으로 증가했다. 사실 모나코 칼리버 11을 착용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것 중 하나가 파워 리저브였다. 셀리타 기반이라 대략 40시간 정도였는데, 로터 효율까지 그리 좋은 편이 아니라서 보관함에 있는 시계 중에 가장 빨리 멈춰 섰다. 쓸 데 없이 브레이크 성능이 좋다고 할까. 매일 착용하지 않는 이상, 모나코는 매번 날짜를 맞춰서 착용해야 하는 시계였다. 크라운이 왼쪽에 있어서 내 경우에는 시계를 거꾸로 뒤집은 다음 오른손으로 와인딩을 했는데, 덕분에 나는 시계가 뒤집힌 상태에서도 정확하게 시간을 맞출 수 있는 특별하고도 무용한 능력을 갖게 되었다.
그런 모나코의 파워 리저브가 대폭 상승했다는 건 꽤 반가운 일이었다. 하지만 세상 모든 것은 등가 교환.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는 법. 새로운 모나코 호이어 02는 케이스 백 두께가 1mm 정도 증가해 전체 두께가 15.21mm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의 두께를 감안해도 적은 수치는 아니다. 착용 시 케이스 백이 가려진다고 하지만 체감 두께는 꽤 차이가 났다. 또 6시 방향에는 세컨드 핸즈가 추가되었다. 12시간 계측이 가능해진 것은 장점이지만 어쨌든 오리지널 모델에 없던 요소가 추가되면서 바이컴팩스 크로노그래프의 디자인 밸런스가 붕괴된다는 건 아쉬웠다.
모나코 호이어 02의 등장과 함께 같은 디자인을 공유하는 모나코 칼리버 12는 단종 수순을 밟았다. 하지만 복각 디자인의 칼리버 11은 살아남았다. 호이어 02 무브먼트의 크라운을 왼쪽으로 옮기는 작업이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칼리버 11을 선택했던 나의 혜안에 엄지를 치켜들며 호이어 02 모델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새로운 플랫폼을 기반으로 각종 한정판 모나코가 연달아 출시되었고, 결국 내 욕망에 불을 지른 모나코가 기어코 등장하고야 말았다. 2021년 출시된 모나코 그린 다이얼 리미티드 에디션이었다.
당시 청담 부티크에서 실물을 처음 봤는데, 기존의 어떤 모나코와도 다른 아우라가 느껴졌다. 컬러 기교를 배제한 순수하고 명징한 그린 선버스트 다이얼. 여기에 그러데이션 효과를 줘서 바깥쪽으로 갈수록 블랙 톤으로 변하도록 했고, 가장 바깥쪽 파츠에서 완전한 블랙으로 마무리했다. 다이얼의 원형 안쪽 부분과 원형 바깥쪽 부분의 파츠를 분리하여 여러 컬러 조합을 시도할 수 있도록 설계한 덕분이다. 서브 다이얼에는 무광 블랙 컬러를 적용했고, 서브 다이얼 핸즈와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에는 화이트 컬러를 조합했다. 여기에 블랙 악어가죽 스트랩을 체결하니 전에 본 없는 시크한 드레스 워치다.
‘호이어가 있으니 태그호이어도 있어야지. 무브먼트도 다르잖아. 괜찮아, 괜찮아!’ 결국 지름신의 속삭임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주제에 맞지 않게 무려 두 개의 모나코를 보유하게 되었다. 두 번째 모나코의 소유 기간은 길지 않았다. 다음 사용자를 위해 잠시 맡아두었을 뿐. (잠시 착용하다가 곧 이어서 출시된 까레라 그린 리미티드 에디션으로 기변했다) 약간의 통장 출혈이 있었으나 월급처럼 잠시 스쳐갔던 모나코 호이어 02는 새로운 모나코의 가능성을 내게 알려주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무게였다. 호이어02 무브먼트의 경량화 효과 때문인지 체감 무게가 꽤나 가벼웠다. 숲을 닮은 그린 다이얼의 독특한 색감도 매력적이었다. 초여름의 인왕산을 산책하면서 나무와 하나가 되었던 장면이 아직도 생생하다. 왼쪽 크라운에 익숙해 있던 내게는 평범한 오른쪽 크라운도 생경하게 다가왔다. 칼리버 11 모델은 왼쪽에 튀어 나온 크라운과 수평 인덱스 때문에 가로 폭이 넓어보였는데, 호이어 02 모델은 상대적으로 슬림했다. 전체적인 블랙 기조에 핸즈의 화이트 컬러도 깔끔한 느낌을 줬다. 사실 시계 자체에는 문제가 없었다. 곧 이어서 출시된 까레라 그린 리미티드 에디션이 취향상 더 우위에 있었을 뿐. 아마 까레라가 아니었다면 두 번째 모나코를 조금 더 오래 소장했을 거다.
세상엔 그런 사람이 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어떻게든 떠오르는. 그리고 그런 사람을 닮은 시계가 있다. 내게는 모나코가 그랬다. 세 번째 모나코가 찾아온 건 첫 번째 모나코를 보내고, 1년 만이었다. 만약 내게 시계 생활 중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을 묻는다면 코로나 팬데믹 이전에 서브마리너 헐크를 사두지 못한 것도 아니요, 몽블랑 시계 두 개를 중복 구매한 것도 아닌, 첫 번째 모나코를 방출했을 때를 꼽겠다. 당시 ‘내 집’이라는 엄청난 물건을 지르면서 자금난에 봉착한 나는 멘탈이 잠시 털리면서 가지고 있던 시계를 모조리 장터에 올려놓았다. 그 중에서 가장 먼저 연락이 온 게 모나코 문의였다. 이것이 아이코닉 워치의 힘인가!
험하게 착용한 덕분에 제값을 받지 못했지만 심리적인 안정감이 필요했던 나는 뭔가에 홀린 듯 모나코를 하한가에 던져버렸다. 돌이켜보면 고작 시계 하나 판매한 정도로는 자금 상황 개선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2025년 현 시점에서 내가 무심코 던졌던 그 모나코 칼리버 11의 정가는 1,078만 원이다. 가격적인 손실보다도 내가 모나코와 쌓아온 7년의 시간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게 두고두고 후회가 되었다. 결국 이 감정은 새로운 인연으로 이어졌다. 세 번째 모나코는 모나코 호이어 02 걸프 에디션이다. 2023년 GPHG에서 아이코닉상을 수상한 바로 그 모델이다. 가족 여행을 핑계 삼아 멀리 여수까지 가서 중고거래를 했는데, 여행 비용이 추가되면서 결과적으로 신품 가격보다 비싸게 구입했다.
걸프 에디션은 ‘모나코’라는 이름으로 발간하는 일종의 비정기 간행물 같은 거다. 한정판은 아니지만 스페셜 에디션으로 시차를 두고 꾸준히 발매된다. 호이어 02 무브먼트로 풀체인지된 이후에도 어김없이 걸프 에디션이 등장했다. 모나코 걸프 에디션은 영화 <르망>에서 스티브 맥퀸이 탑승했던 걸프 컬러의 포르쉐 917K에서 영감을 받았다. 영화 속 포르쉐 917K처럼 다이얼에 라이트 블루와 오렌지 컬러 스트라이프가 들어가는데, 최신 모나코 걸프 에디션은 이 컬러 데칼이 매우 슬림하게 디자인되었다. 스트라이프가 메인 다이얼 안쪽에서 한 번 끊어졌다가 우측 서브 다이얼 테두리에 포인트를 주고 다시 이어지는 변주도 재밌다.
사실 디자인보다도 내 마음을 홀렸던 건 다이얼의 색감이다. 레귤러 모델의 블루보다 더 깊고 진한 블루 선버스트 다이얼로 차별화했다.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와 서브 다이얼 핸즈도 레드에서 오렌지 컬러로 바뀌어서 전반적으로 더 산뜻하다. 스트랩은 펀칭 처리된 딥블루 컬러의 소가죽 스트랩인데, 칼리버 11의 가죽스트랩과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펀칭 홀이 꽤 큰 편이고, 스트랩 뒷면에는 오렌지 컬러의 러버 소재를 덧대어 걸프 에디션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두 번째 모나코에서 잠깐 경험했던 호이어 02 모델의 가벼운 무게도 선택에 영향을 미쳤다.
이 세 번째 모나코는 2년 정도 소장했는데, 방출 이유가 조금 특이하다. 첫 번째 모나코를 워낙 험하게 차서 이번에는 매우 아껴서 착용했는데, 오히려 그게 불편함의 이유가 되었다. 1년 정도 스크래치가 안나다 보니 갈수록 더 아껴 차게 되었고, 일명 ‘모시고 살아야 하는’ 시계가 되면서 착용횟수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가볍다고 생각했던 무게도 보관함에 더 가벼운 경쟁자들이 등장하면서 어느새 무겁게 느껴졌다. 하늘색과 오렌지색 스트라이프가 너무 캐주얼하다고 느꼈던 늦가을, 모나코 걸프 에디션은 계절의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서두가 길었다. 드디어 네 번째 모나코 차례다. 앞서 언급했듯이 티타늄 케이스에 브리티시 그린 컬러를 조합한 모델이다. 모나코 걸프 에디션을 방출한 뒤로 당분간 모나코는 이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금세 새 모델이 눈에 띄었다. 이번 지름의 핵심 동기는 티타늄 소재다. 오랜 타이핑 노동과 시계 생활 덕분에 점점 무거운 시계를 멀리하게 된 게 결정적이었다. 2023년에 티타늄 케이스의 레이싱 블루 모델을 먼저 접했는데, 걸프 에디션의 무게가 무겁다고 느껴질 때쯤 어느새 이 티타늄 모델이 시야에 들어왔다. 사실 이 모델은 2024년 기준으로 국내에서 이미 완판된 모델이라 단념하고 있었는데, 태그호이어가 국내에 직진출하면서 해외 재고 한 피스가 국내에 들어온 걸 발견했다. 그리고 머지않아 비슷한 콘셉트의 모나코 레이싱 그린 모델이 새롭게 출시되었다. 생각지도 않았던 티타늄 한정판 모델 두 개를 동시에 저울질 하게 된 것! 몇 차례의 비교 시착 끝에 결국 레이싱 그린 모델로 낙점했고, 손목에 네 번째 모나코를 올리게 되었다. 둘 다 마음에 들었지만 평소 복장의 컬러 코드를 고려할 때 그린 쪽이 좀 더 활용성이 높았다. 또 10년째 타고 있는 미니 쿠퍼와의 상성도 브리티시 그린 쪽이 좋다고 생각했다.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레이싱 그린 모델은 2023년 출시되었던 레이싱 블루 모델의 후속작이다. 하지만 ‘칼리버 11을 탑재한 그레이 선버스트 다이얼의 티타늄 케이스 모나코’라는 접근법을 취한다면 그 뿌리는 2021년 등장했던 ‘모나코 티탄’ 모델이 될 것이다. 당시 샌드 블라스트 피니싱 처리한 티타늄 케이스로 기존 스틸 케이스의 모나코와 다른 분위기를 선사했다. 전 세계 500개 한정판이었고, 모나코 컬렉션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블랙 컬러라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시계는 모나코 컬렉션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티타늄 소재를 접목해서 그동안 모나코의 발목을 잡았던 ‘착용감’과 ‘무게’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기 때문이다. 물론 뱀포드와 협업한 카본 모델 등 일부 경량화 제품이 있긴 했지만 대중적인 모델은 아니었다. 이 샌드 블라스트 티타늄 케이스는 현재 레이싱 블루 모델은 물론 호이어 02 기반의 모나코 스켈레톤 모델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모나코 크로노그래프 레이싱 그린 모델은 2023년 출시되었던 레이싱 블루 모델의 후속작이다. 하지만 ‘칼리버 11을 탑재한 그레이 선버스트 다이얼의 티타늄 케이스 모나코’라는 접근법을 취한다면 그 뿌리는 2021년 등장했던 ‘모나코 티탄’ 모델이 될 것이다. 당시 샌드 블라스트 피니싱 처리한 티타늄 케이스로 기존 스틸 케이스의 모나코와 다른 분위기를 선사했다. 전 세계 500개 한정판이었고, 모나코 컬렉션에서는 상대적으로 비주류인 블랙 컬러라서 큰 반향을 일으키지는 못했던 것 같다. 어쨌든 이 시계는 모나코 컬렉션에 새로운 화두를 던졌다. 티타늄 소재를 접목해서 그동안 모나코의 발목을 잡았던 ‘착용감’과 ‘무게’ 문제를 어느 정도 해결했기 때문이다. 물론 뱀포드와 협업한 카본 모델 등 일부 경량화 제품이 있긴 했지만 대중적인 모델은 아니었다. 이 샌드 블라스트 티타늄 케이스는 현재 레이싱 블루 모델은 물론 호이어 02 기반의 모나코 스켈레톤 모델에도 널리 활용되고 있다.
모나코 레이싱 그린 모델은 2024년 말 구입 이후 대략 4개월 정도 착용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최근 2~3년간 구입했던 시계 중에서 톱클래스에 들 만큼 만족스럽다. 일단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은 역시 무게! 크로노그래프 워치임에도 스틸 소재의 다른 타임 온리 워치보다 가볍다. 투박한 샌드 블라스트 피니싱 덕분에 스크래치에도 무심해질 수 있다. 게다가 비록 조정 방식은 구식이지만 정밀하게 미세 조정이 가능한 티타늄 디 버클 덕분에 어떤 상황에서도 부담 없이 착용하고 외출할 수 있다. 이렇게 데일리로 활약하는 크로노그래프 워치는 오랜만이다.
물론 처음부터 모든 게 마음에 쏙 들었던 건 아니다. 짧은 경험으로 조심스럽게 얘기하자면, 시계(혹은 사람)에는 크게 두 분류가 있다. 처음엔 너무 좋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멀어지는 것과, 처음엔 별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가까워지는 것. 이번 모나코 레이싱 그린 모델은 후자였다. 구입하고 실착용을 하면서 몇 가지 실망스러운 게 눈에 띄었다. 정면에서 바라볼 때 그레이 색감이 너무 밋밋했고, 빛의 방향에 따라 가끔 안드로메다로 날아가 버리는 서브 다이얼의 색감도 어색했다. 하지만 시계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수록 새로운 멋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각형 실버 다이얼은 그야말로 카멜레온 같다. 선버스트 피니싱 특유의 빛 반사가 과하지 않고, 각도에 따라 블랙 컬러가 먹물처럼 올라오면서 자연스러운 무채색 톤을 만든다. 주변 조명과 옷 색깔에 따라 색감이 달라지기도 한다. 실버 다이얼은 주변의 색을 머금고 반사시키는데, 주광색 조명에서는 샴페인 골드나 새먼 컬러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니크한 사각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와 실버 선버스트 다이얼의 조합도 훌륭하다. 모나코의 전면 글라스는 사각형 안에 숨어 있는 은은한 곡선과 각 모서리의 미세한 절삭 가공으로 화려한 빛 반사를 연출한다. 마치 고급스런 보석 상자가 연상된다. 이 사각 글라스를 통과한 빛이 다이얼의 은색 캔버스에 그대로 뿌려진다. 모나코의 사각 글라스는 잘 설계된 프리즘과 같다. 빛이 굴절되면서 글라스 모서리에 가끔 무지개를 만들어내는데, 이번에는 그 굴절된 빛이 다이얼까지 침투해 실버 다이얼에 무지개가 뜨는 걸 자주 관찰하게 된다. 이전의 매트한 블루 컬러 다이얼에서는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선물이다.
샌드 블라스트 처리된 그레이 톤의 티타늄 케이스와 실버 선버스트 다이얼의 조합도 의외로 괜찮았다. 사실 구입하기 전에는 샌드 블라스트 피니싱이 너무 성의 없고 투박하다고 생각했다. 스틸 케이스의 피니싱과 함께 놓고 보면 더욱 비교가 된다. 새틴 브러싱과 폴리싱이 각 단면마다 적절하게 섞여 있는 스틸 모델과 달리 티타늄 모델은 케이스 전체를 동일하게 샌드 블라스트 처리했다. 그런데 가격은 스틸보다 훨씬 더 비싸다. 소재의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웠다. 특히 케이스 전체를 샌드 블라스트 처리한 해밀턴의 카키 필드 메카니컬이 뇌리에 강제 소환되면서 더 비교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오래 착용하다보니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이 시계는 케이스와 다이얼이 둘 다 무채색이다. 자칫하면 다이얼과 케이스가 한 데 섞여서 형태감이 모호해질 수 있다. 이 시계는 반짝이는 실버 선버스트 다이얼이 투박한 티타늄 케이스를 보완하고, 반대로 티타늄 케이스 또한 실버 선버스트 다이얼의 부족한 점을 가려준다. 사실 실버 다이얼은 블랙이나 블루 다이얼에 비해 스틸 케이스에서 다이얼의 존재감이 약해진다. (물론 이걸 일부러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무광 그레이 컬러의 티타늄 케이스는 그 자체로 실버 다이얼의 심심한 색감을 잡아주면서 시계에 분명한 형태감을 부여한다. 밋밋한 스케치에 또렷한 외곽 라인을 그려준다고 할까? 게다가 빈티지 레이싱 자동차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스토리를 고려하면 투박한 티타늄 재질이 납득되기도 한다. 그린 컬러의 서브 다이얼은 얼핏 무광 피니싱한 것처럼 보이지만 스틸 모델과 마찬가지로 오팔린 마감하여 광량이 많을 때는 꽤 반짝인다. 딥그린에서 틸그린까지 색감 변화가 크다는 게 단점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장점이 될 수도 있겠다.
무브먼트 얘기를 하기 전에 고백할 게 있다. 사실 첫 모나코를 구입했을 때 칼리버 11 무브먼트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듈을 올리긴 했지만 어쨌든 셀리타 계열의 범용 무브먼트였고, 파워 리저브와 와인딩 효율도 성에 차지 않았다. 무브먼트 사이즈도 케이스에 비해 작았으며, 피니싱도 어쩐지 평범해 보였다. 다만 그 안에 담긴 1969년의 이야기,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를 두고 경쟁했던 시계 역사의 희미한 흔적이 마음에 들었을 뿐이다. 모나코 레이싱 그린에 탑재된 무브먼트는 그때와 다르지 않다. 여전히 파워 리저브는 짧고 크로노그래프의 조작감은 엉성하다. 수직 클러치가 적용되어서 작동 시 부담이 적다는 게 그나마 위안거리다.
하지만 시계 경험이 어느 정도 축적된 지금 시점에서, 칼리버 11 무브먼트가 예전과 조금 다르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호이어 02 모델을 오래 경험하고 나서 더 확실히 알게 되었다. 칼리버 11 모델은 호이어 02 모델보다 어쨌든 더 얇다. 직접 착용해보면 1mm의 차이가 꽤 크게 느껴진다. 걸프 에디션을 2년 정도 착용하다가 레이싱 그린 모델을 처음 착용했을 때 ‘얇다’는 말이 저절로 튀어 나왔으니까. 물론 객관적으로 보면 14.3mm가 얇은 두께는 아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거다. 여기에 티타늄 케이스의 가벼운 무게가 어우러지면서 이제야 진정한 데일리 모나코가 완성되었다. 6시 초침이 없어지면서 군더더기 없는 투 카운터 디자인이 되었다는 것도 마음에 든다. 사소할 수 있지만 이 모든 것이 칼리버 11 덕분이라는 걸 부정할 수 없을 거다. 피니싱은 오히려 호이어 02보다 일부 나은 부분도 있다. 무브먼트의 표면은 선명하게 반짝거리며, 촘촘한 페를라주와 제네바 스트라이프는 고전적인 멋을 더한다. 현대적인 설계의 호이어 02에서는 느낄 수 없는 클래식의 멋이 있다.
짧은 파워 리저브는 칼리버 11의 근본적인 한계이니 넘어간다고 쳐도 한 가지 치명적인 단점이 있긴 했다. 착용하는 내내 디 버클의 모서리가 지나치게 날카로워서 꽤 거슬렸다. 스틸 복각 모나코의 디버클과 같은 디자인인데, 왜 이런 걸까? 한참을 살펴보다가 겨우 답을 찾았다. 바로 피니싱의 차이였다. 스틸 디 버클은 폴리싱 처리를 하기 때문에 모서리가 부드럽게 가공된다. 하지만 티타늄 디 버클은 샌드 블라스트 피니싱 처리를 하면서 모서리 가공이 상대적으로 날카롭게 마무리된 것. 일단 러그에 얇은 반창고를 붙여서 응급처치(?)를 하긴 했지만 고가의 플래그십 모델인 만큼 제조사에서 조금 더 신경을 써줬으면 하는 바람이다.
딥그린 컬러의 펀칭 스트랩은 안쪽이 러버로 마감되어 있어 땀이 차도 쉽게 손상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름에 같은 티타늄 케이스를 공유하는 모나코 스켈레톤의 블랙 러버 스트랩으로 교체할 예정이다. 그린 서브 다이얼과 옐로 컬러 크로노그래프 세컨드 핸즈 덕분에 잘 어울릴 것 같다고 행복회로를 돌려본다.
언젠가 지금의 네 번째 모나코 역시 ‘방출’을 고민하는 순간이 올 것이다. 하지만 잠시 떠나 있을 뿐 곧 다음 모나코를 만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영화 <르망>에서 스티브 맥퀸은 이렇게 말했다. “레이싱은 인생의 모든 것이며, 레이싱을 하지 않는 시간은 레이싱을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다.” 나는 레이싱 대신 모나코라는 고유명사를 살짝 붙여 본다. 내게 모나코는 시계 생활의 모든 것이며, 모나코가 없는 시간은 모나코를 기다리는 시간일 뿐이라고. 나는 네 번째 모나코와 함께 트랙에서 다섯 번째 모나코를 기다린다. 내 앞에 몇 번의 코너가 남아 있을까. 여전히 두근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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