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가 갖고 싶었던 첫 시계는 스위스 시계가 아니라 일본 시계였다. 브랜드는 카시오. 초등학교 시절, 대구에서 서울로 향하던 관광버스 맨 뒷자리로 기억한다. 옆 자리에 앉은 낯선 친구가 네모난 손목시계를 두 손에 움켜잡고 정신없이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작은 흑백 액정 화면에서 뭔가 깜빡이며 움직였고, ‘삑삑’거리는 전자음이 들려왔다. 시계 아래에는 작은 자동차 계기반도 보였다. 그랬다. 무려 ‘게임’을 할 수 있는 ‘시계’였다. 한참을 넋 놓고 구경하던 내가 측은해 보였는지, 그 친구는 시계를 내게 건네줬다. “한 번 해볼래?” 당시 초등학생에게는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노틸러스나 로열오크를 쿨하게 차보라며 건네준 것이겠지. 아무튼 그 작은 시계, 아니 게임기에 나는 완전히 빠져들었다.
작은 시계 안에는 1인칭 시점에서 진행되는 레이싱 게임이 내장되어 있었다. (글을 쓰려고 구글링을 해보니 그건 카시오 GR-15 챔피언 레이서 워치였다) 버튼이 두 개 뿐이라서 좌우 이동만 할 수 있었고, 트랙 중앙의 아이템을 획득하면 속도가 증가했다. 다른 자동차들을 피해 트랙 중앙의 속도 증가 아이템을 지속적으로 획득하면서 최고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포인트였다. 속도가 오를수록 각종 장애물을 피하기가 더 어려워지기 때문에 한 순간도 긴장을 놓치면 안된다. 지금도 그날의 ‘손맛’이 생생하게 기억날 만큼 인상적이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버스는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었고, 나는 그날 이후 두 번 다시 그 게임기, 아니 시계를 볼 수 없었다.
난데없이 왜 초딩 시절 게임 얘기냐 하겠지만, 이건 지금의 기계식 시계 얘기와도 무관하지 않다. 손목에 착용하는 장난감이라는 점에서 내 시계는 여전히 1980년대 카시오 게임 워치의 시간 속에 머물러 있으니까. 네덜란드의 역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인간을 ‘호모 루덴스(Homo Ludens, 유희적 인간)’로 정의했다.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문명과 문화가 결국 ‘놀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놀이는 실용적 목적을 벗어나 특정 시공간에서 행해지는 자유로운 행위다. 자발적이지만 구속력이 있는 규칙이 존재하며, 그 과정에서 강력한 몰입이 발생한다. 무엇보다 놀이는 어떤 경제적 부가가치도 남기지 않으며, 놀이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놀이를 하는 이유는 오직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이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몰입이 발생한다.
기계식 시계를 구입하고 수집하는 것도 이러한 정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 같다. 오늘날 손목시계는 시간을 확인한다는 본래의 ‘실용적 목적’에서 벗어나 있다. 그보다는 제품을 경험하는 과정에서 ‘쾌락’을 얻기 위해 값비싼 비용을 ‘기꺼이’ 지불한다. 저마다 수집의 원칙이나 ‘규칙’도 있다. 그리고 어느새 강하게 ‘몰입’한다. 우리는 시계를 통해 아름다움을 느끼고,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브랜드의 꿈과 이야기를 공유한다. 흔히 손목시계를 ‘남자들의 장난감’이라 부르는 것도 이런 시계의 유희적 특성을 반영한 것이리라. 그리고 어떤 타임피스는 내가 초딩 시절 만났던 카시오 게임 워치에 좀 더 가까이 닿아 있다. 이를테면 보드게임에서 비디오게임까지 다양한 놀이에서 영감을 얻은 시계들.
스마트 워치에 온갖 게임을 다운로드 받아 플레이할 수 있는 시대다. 카시오는 작은 IC 칩으로 1980년대에 이미 수준급 레이싱 게임을 구현했다. 하지만 기계식 메커니즘으로 이런 수준의 정교한 게임을 구현하는 건 지금도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도 아예 게임 워치가 없는 건 아니다. 정교한 컴플리케이션으로 실제 게임을 구현하는 시계들도 일부 존재한다.
이 분야의 장인을 꼽는다면 단연 크리스토프 클라레(Christophe Claret)다. 1989년 율리스 나르덴의 산마르코 미닛 리피터를 제작하면서 유명해진 그는 같은 해 자신의 이름을 딴 독립 시계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21년이 지난 2010년 ‘21 블랙잭’이라는 독특한 타임피스를 선보였다. 이 시계는 카드 게임의 이미지만 따온 것이 아니라 실제 블랙잭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케이스 좌측 중앙 푸셔를 누르면 다이얼 아래 배치된 7개의 카드 휠이 빠르게 회전하고 딜러와 플레이어의 디스플레이 창에서 랜덤으로 멈춘다. 이후 딜러용 푸셔와 플레이어용 푸셔를 누르면 가려졌던 창이 열리면서 카드와 승패를 확인할 수 있다. 창이 열릴 때는 차임 기능도 작동한다. 단순하지만 게임을 즐기기에는 충분하다. 물론 시계 애호가들에게는 게임을 작동시키는 정교한 기계식 메커니즘이 게임보다 더 짜릿하고 흥분될 것이다.
케이스 백에는 로터를 활용한 카지노 룰렛이 위치하며(행운의 숫자를 임의로 세팅할 수 있다!) 케이스 오른쪽 측면 미니 쇼케이스에는 게임을 위한 초소형 주사위까지 들어 있다. 그야말로 카지노의 완벽한 축소판이다. 라스베이거스를 여행할 때 착용하면 완벽할 것 같다. 기계식 시계로 카드 게임을 구현한 크리스토프 클라레는 이후 2012년 ‘바카라’, 2014년 ‘포커’ 컬렉션을 출시하며 이른바 ‘카지노 3부작’을 완성했다.
카지노 게임이라면 슬롯머신을 빼놓을 수 없다. 원래 슬롯머신은 순수하게 ‘기계식’ 장치였으나 1964년 미국의 볼리(Bally)가 전자식 슬롯머신을 만들면서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어쩐지 쿼츠 위기를 겪었던 기계식 시계업계가 떠오른다. 눈물 좀 닦고. 어쨌든 기계식 레버를 전자식 버튼이 대체하면서 슬롯머신 특유의 ‘손맛’도 사라졌다. 제라드-페리고가 2007년 선보인 ‘1945 빈티지 잭팟 투르비용’은 과거 기계식 슬롯머신의 작동 원리를 구현한 컴플리케이션 워치다.
1945 빈티지 컬렉션의 직사각형 케이스는 아르데코의 우아함을 표현하는 동시에 슬롯머신의 실루엣을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케이스 오른쪽 레버를 당기면 다이얼 12시 방향에 위치한 세 개의 릴이 회전하기 시작한다. 잠시 후 릴이 오른쪽부터 하나씩 멈추면서 차임 소리를 들려준다. 땡, 땡, 땡! 릴에는 다섯 가지 슬롯머신 이미지가 그려져 있는데, 모두 골드 소재에 내부를 인그레이빙한 뒤 래커 처리했다. 세 개의 릴로 만들 수 있는 조합은 총 125개, 연속으로 같은 기호가 나타날 확률은 25분의 1이다. 잭팟의 상징이 ‘종’ 모양인 것은 이 시계가 최초의 슬롯머신 중 하나인 ‘자유의 종’에서 영감을 받았기 때문. 6시 방향의 투르비용 케이지에는 제라드-페리고를 상징하는 커다란 골든 브리지가 연결되어 있다.
작은 슬롯머신을 구현하기 위해 제라드-페리고는 완전히 새로운 무브먼트를 설계했다. 투르비용에 슬롯머신과 스트라이킹 메커니즘을 결합해 독특한 그랑 컴플리케이션을 완성한 것이다. 6시 방향의 투르비용이 정확성을 상징한다면, 12시 방향의 슬롯머신 창은 우연성을 상징한다. 사실 고도의 정확성을 추구하는 기계식 럭셔리 워치가 슬롯머신 게임의 우연과 불확실성을 구현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아이러니다. 하지만 기계식 시계가 결코 정확한 시간에 도달할 수 없고 불확실한 오차를 끊임없이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슬롯머신이라는 상징은 꽤 흥미롭게 읽힌다. 제라드-페리고는 상반된 두 요소를 성공적으로 결합했고, 기계식 시계 분야에서 새로운 잭팟을 터뜨렸다. 거대한 시계 패키지에는 두 벌의 카드와 주사위, ‘GP’가 적힌 게임 칩까지 들어 있어서 완벽한 카지노 분위기를 느껴볼 수 있다.
카지노 테마 워치는 한동안 명맥이 끊어졌다가 최근에 다시 부활했다. 이미 아스트로노미아 컬렉션에서 카지노 콘셉트의 시계를 선보였던 제이콥앤코는 2023년 실제 카지노 룰렛 게임을 즐길 수 있는 손목시계를 선보였다. 이 타임피스는 겉모습부터 완벽한 겜블러다. 다이얼 전체를 룰렛 형태로 디자인해서 카지노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냈다. 1부터 36까지 숫자를 블랙과 레드 컬러로 레커 처리했고, 제로(0)에는 그린 컬러를 적용했다. 7시 방향 푸셔를 누르면 다이얼의 룰렛이 회전하고, 작은 볼이 춤추기 시작한다. 회전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실제 룰렛 게임의 스릴을 충분히 맛볼 수 있다. 시간을 알려주는 중앙 다이얼은 오닉스 소재로 제작했으며 룰렛 회전에 방해되지 않도록 살짝 솟아올라 있다.
룰렛 기능을 갖춘 칼리버 JCAM51은 투르비용 컴플리케이션까지 갖췄는데, 게임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메커니즘을 케이스 백에 숨긴 것에서 겜블러의 여유가 느껴진다. 시계에 숨겨진 투르비용의 회전 메커니즘은 마치 룰렛 게임의 은유처럼 읽힌다. 게임을 하지 않을 때도 투르비용의 룰렛은 계속 회전하며 우리의 운명이 어딘가로 흘러가고 있음을 암시한다. 혹시라도 제이콥앤코 카지노 투르비용 워치를 찰 때는 거실에 이 노래를 틀어둬야겠다. 지금은 고인이 된, ZARD 사카이 이즈미의 ‘운명의 룰렛을 돌리며(運命のルーレット廻して)’
앞서 소개한 여러 카지노 게임은 모두 도박을 위한 놀이다. 도박은 대체로 경제적인 ‘이익’을 추구하며, 놀이 과정에서 ‘우연’이 크게 작용한다. 그래서 혹자는 이런 게임을 놀이에서 배제하기도 한다. 놀이라는 것은 경제적 이익에 관계없이 무용한 일에 자발적으로 빠져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놀이의 본질을 완벽하게 구현한 손목시계가 있다. 바로 오틀랑스의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Playground Labyrinth)다.
이 시계(?)에는 시간을 알려주는 기본 기능이 아예 삭제되었다. 핸즈와 인덱스가 있어야 할 다이얼에는 작은 미로가 놓여 있다. 잠시 일상에서 벗어나 작은 공을 움직여 골인 지점까지 모험을 떠나라는 거다. 다이얼의 미로는 현실의 시간을 소모해서 놀이의 시간 속으로 들어오라는 초대장이다. 이게 무슨 시계냐 하겠지만, 작은 미로 안에도 어쨌거나 시간이 흐른다. 게임을 진행하면서 잠시 빠져드는 놀이의 시간은 일상의 시간과 전혀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어쩌면 미로보다 더 복잡하고 답답한 현실의 시간이 자신의 출구를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시계는 미궁 속으로 사라졌지만 시계의 미학은 미로 안에 남겨 두었다. TV 브라운관이 연상되는 팔각 형태의 티타늄 케이스는 여러 단면을 지니고 있으며, 경사면이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까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미로 다이얼은 로즈 골드 혹은 화이트 골드로 제작했고, 작은 공은 컬러 대비가 되도록 플래티넘 혹은 로즈 골드 소재로 만들었다. 미로의 바닥은 샌드 블라스트, 벽은 새틴 브러시드 마감했으며, 벽 테두리는 모두 베벨링 처리했다. 미노타우로스가 살기에는 꽤 고급스런 미궁이다. 케이스 백을 통해 내부의 기계적인 구조도 엿볼 수 있다. 크라운을 돌리면 기계식 리프트가 작동해 골인 지점에 도착한 공을 출발 지점으로 들어 올려 준다.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의 슬로건은 ‘쓸모없지만 완전히 필수적인 물건’이다. 인간에게 놀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놀이는 경제적 보상이 없는 행위에 몰입하는 것이며, 전혀 쓸모없어 보이지만 행복한 삶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사실 넓은 의미에서 기계식 시계 자체가 그런 물건이긴 하다. 플레이그라운드 라비린스는 그 개념을 보다 극단적으로, 유희적으로 드러낸다. 삶에 여유를 허락하는 것이 진짜 럭셔리다. 이 시계는 바쁜 현대인에게 잠시 허락된 사치이자 순수한 놀이의 세계로 안내하는 멋진 미궁이다.
직접 게임을 즐길 수는 없지만 비디오게임에서 영감을 받은 시계들도 많다. 스위스 워치 브랜드 중에서는 한때 로맹 제롬(RJ)이 꽤 적극적이었다. RJ는 2012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시작으로 <팩맨>, <테트리스>, <슈퍼마리오>, <동키콩> 등 비디오게임 여명기의 명작들을 다이얼에 담아냈다. 이 비디오게임 컬래버레이션은 RJ의 ‘문 인베이더(Moon Invader)’ 컬렉션에 기반을 두고 있다. 46mm의 쿠션형 블랙 PVD 스틸 케이스는 달 착륙선을 닮았는데, 베젤에서 뻗어나간 4개의 다리가 러그 역할을 한다. 아폴로11호 예비 부품에서 가져온 메탈 파츠를 일부 사용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우주를 모티브로 한 시계다.
RJ는 여기에 보다 특별한 스토리를 담아내기 위해 역사적인 슈팅 게임 <스페이스 인베이더>를 가져왔다. 2007년 타임지가 선정한 역대 가장 영향력 있는 비디오 게임 1위에 선정된 작품이다. 다이얼에는 게임 속 장면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우주에서 온 귀여운(?) 침입자들과 이를 저지하는 레이저 발사대를 픽셀 그래픽으로 표현한 뒤 특수 래커로 채색했다. 블랙 다이얼 역시 픽셀의 피니싱을 다르게 처리해 입체감을 더했다. 특히 흑백 버전과 컬러 버전을 각각 출시한 걸 보면 이 브랜드가 게임에 얼마나 진심인지 알 수 있다. (발매 당시 흑백 모니터 화면에 컬러 셀로판지를 붙여서 컬러효과를 주었다)
<스페이스 인베이더>가 쏘아 올린 RJ의 비디오게임 컬렉션은 이후 <팩맨>, <슈퍼마리오> 등 다양한 타임피스로 이어졌다. 같은 게임이라도 다양한 버전으로 출시했는데, <팩맨>의 경우 각 버전을 게임 스테이지에 맞춰 다르게 표현한 것도 위트 넘친다. 시계 패키지의 조이스틱도 사소하지만 추억을 소환하는 요소다. ‘지능계발’을 위해 오락실에서 시간을 흘려보낸 아케이드 키즈라면 하나쯤 소장해도 좋을 것이다.
1980년대가 슈팅과 액션 게임의 전성기였다면, 1990년대는 대전격투 게임의 호황기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캡콤의 <스트리트 파이터 2>가 있었다. 이 게임 때문에 인생이 바뀐 사람이 나를 포함해 어디 한둘이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여기, 그 시절 오락실에서 ‘하도켄!’과 ‘쇼류켄!’ 좀 날려본 사람을 위한 시계가 있다. ‘세이코 5 스포츠 스트리트 파이터 5 리미티드 에디션’이다.
시리즈 5편을 기념하는 것이긴 하지만 모티프가 된 캐릭터들은 모두 <스트리트 파이터 2> 시절부터 활약했던 인물들이다. 류, 켄, 춘리, 가일, 블랑카, 장기에프까지 각 캐릭터의 상징적인 특징을 시계에 절묘하게 담아냈다. 예를 들어 류는 흰색 도복의 컬러와 베젤의 파동권 이펙트가 특징이다. 가일의 경우, 다이얼에 군인을 연상시키는 카모플라주 디자인과 친구 내쉬의 군번줄을 넣었고, 베젤에는 카운트다운 기능을 넣어 밀리터리 분위기를 연출했다. 다이얼에 팔찌 디테일을 넣은 블루 컬러의 춘리 에디션, 베젤에 일렉트릭 썬더 필살기 이펙트를 넣은 블랑카 에디션도 멋지다.
태그호이어는 2021년 자신들의 스마트 워치에 과거 아날로그 시대의 게임 캐릭터를 소환했다. ‘커넥티드 × 슈퍼마리오 리미티드 에디션’은 비디오게임의 거장 닌텐도와의 장기 협업을 기념하는 첫 결과물이다. 시계의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에는 <슈퍼마리오>를 상징하는 요소들이 가득하다. 크라운과 스트랩의 클래스프에는 마리오의 ‘M’ 이니셜이 새겨져 있으며, 세라믹 베젤의 3·6·9시 방향에는 각각 버섯, 파이프, 슈퍼스타 같은 게임 속 아이콘들이 배치되어 있다. 곳곳에 사용한 레드 컬러는 마리오의 붉은색 모자와 티셔츠를 연상시킨다. 여기에 <슈퍼마리오>를 테마로 제작한 전용 워치 페이스가 하드웨어의 특별함을 돋보이게 한다.
하지만 단순히 마리오를 보여주기만 하는 건 아니다. 이 스마트 워치는 착용자가 활발하게 움직일수록 마리오 애니메이션을 통해 보상을 받도록 제작되었다. 미리 설정한 목표 운동량의 25, 50, 75%를 달성할 때마다 마리오는 ‘버섯’을 먹고 커지고, ‘파이프’에서 튀어나오며, ‘슈퍼스타’를 얻어 무적이 된다. 그리고 대망의 100% 달성하면 깃대를 잡고 내려오는 마리오 고유의 ‘엔딩’ 장면을 볼 수 있다. 이 소프트웨어 차원의 마리오 애니메이션은 하드웨어 차원의 세라믹 베젤 아이콘과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는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의 결합이며, 기계식 시계 브랜드와 스마트 워치 기술이 어떻게 서로 만나야 하는지 힌트를 준다.
태그호이어의 두 번째 닌텐도 콜라보 제품은 <슈퍼마리오 카트>에서 영감을 얻은 포뮬러 1 모델이다. 태그호이어의 레이싱 헤리티지를 닌텐도의 대표 레이싱 게임과 연결한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포뮬러 1 × 마리오 카트 리미티드 에디션’은 두 가지 모델로 출시되었다. 지름 44mm의 크로노그래프 모델은 블랙 세라믹 타키미터 베젤에 ‘MARIO KART’를 새겼고, 크라운에도 마리오의 이니셜 ‘M’을 레드 컬러로 넣었다. 다이얼에는 레이싱을 연상시키는 체커 무늬를 넣었으며, 9시 방향 서브 다이얼에 카트를 운전하는 마리오 이미지를 넣었다. 특히 날짜 창에는 숫자 대신 슈퍼스타, 등껍질, 킬러, 바나나 등 <마리오 카트> 게임의 상징적인 아이템을 프린트했다.
투르비용 모델은 캐릭터의 움직임이 보다 역동적이다. 6시 방향의 투르비용 케이지에 카트를 운전하는 마리오, 포탄 형태의 킬러, 가시 등껍질 캐릭터를 추가해 실제 쫓고 쫓기는 레이싱 효과를 연출했다. 지름 45mm의 케이스는 5등급 티타늄으로 제작해 무게를 줄였고, 베젤의 타키미터 각인 역시 보다 디테일을 살렸다.
라이엇 게임즈의 <리그 오브 레전드(LOL)>는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저가 플레이하는 PC 게임 중 하나다. 최고의 선수들이 겨루는 ‘롤드컵’은 동시시청자 수가 1억 명에 육박할 정도. 초대박 IP인 만큼 피규어 등 관련 굿즈의 인기도 상당한데, 카시오 지샥에서는 공식 콜라보 시계를 만나볼 수 있다. 출시 모델은 두 가지. GA-110LL은 LOL의 인기 챔피언 징크스를 표현했다. 케이스와 스트랩 곳곳에 핑크, 라이트 블루, 옐로 컬러 등으로 징크스의 톡톡 튀는 개성을 드러냈다. 특히 징크스의 시그너처 무기인 슈퍼 메가데스 로켓을 다이얼 핸즈로 표현해 포인트를 줬다.
풀 메탈 아날로그 시계인 GM-B2100LL에는 LOL 세계관의 헥스테크(Hextech) 마법 기술을 적용했다. LOL을 플레이하는 사람이라면 아마 익숙한 컬러 조합일 것이다. 베젤과 밴드 일부에는 골드 도금 및 블랙 마감 후 일부를 벗겨내 빈티지 룩을 연출했다. 또 LCD를 비롯해서 시계 곳곳에 블루 컬러를 가미해 LOL 세계의 과학과 기술을 마법적으로 표현했다. 브레이슬릿 파츠에 새긴 ‘LEAGUE OF LEGENDS’ 각인과 필트오버 문장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는 요소다. 이 정도면 소환사의 시계로 부족함이 없다.
시계에 비디오게임이 표현되는 것과는 반대로, 비디오게임 안에 시계가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 과거 닌텐도 64로 출시된 FPS 게임 <007 골든 아이>에서는 영화와 마찬가지로 주인공 제임스 본드가 오메가의 씨마스터 300M을 착용한다. 비록 당시 기술적 한계로 완벽하게 똑같이 구현할 수 없었지만 케이스 형태, 인덱스와 핸즈, 브레이슬릿의 디자인 등 씨마스터 300M을 꽤 정교하게 구현했다. 이 시계는 게임에서 인벤토리를 비롯해 게임 플레이를 돕는 도구(말 그대로 툴 워치)로 사용되며, 시계에 내장된 레이저를 사용해 금속 패널을 자르고 탈출하는 등 일부 미션에서 직접 활용되기도 한다. 당시 많은 미국 청소년들이 이 게임을 하면서 오메가 씨마스터 300M을 드림워치로 꿈꿨다고.
해밀턴은 오랫동안 할리우드 영화에 자신들의 시계를 조연으로 출연시켰다. 그리고 2021년에는 그 대상을 비디오게임으로 확장했다. 유비소프트의 <파 크라이 6>에는 해밀턴 카키필드 티타늄 오토매틱 워치가 게임 속 아이템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이 게임 내 특정 미션을 수행하면서 보상으로 획득하게 되는 것. <파 크라이 6>는 ‘야라’라는 가상의 국가를 배경으로 독재자에 맞서는 혁명군의 이야기다. 주인공 ‘다니’는 혁명군에 들어가 주동자 ‘후안’을 만난다. 카키필드는 후안이 게임 설정상 1983년 야라의 전 대통령을 구한 대가로 받은 것이며, 후안은 첫 임무에 성공한 주인공에게 이 시계를 건네준다. 그냥 멋으로 차는 시계는 아니다. 시계를 착용하면 전력 질주 시 전반적인 수비 능력을 높여준다. 게임 플레이에 유용할 뿐만 아니라 게임 속 역사와 스토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는 아이템인 셈이다.
유비소프트는 기계식 시계의 덕목 중 하나인 ‘스토리텔링’을 게임 세계에서 완벽하게 구현했다. 그리고 해밀턴은 이 매력적인 이야기를 현실에서도 경험할 수 있도록 제품화했다. 카키필드 티타늄 오토매틱은 42mm 티타늄 케이스에 <파 크라이 6>를 드러내는 양식화된 6시 방향 인덱스, 그리고 게임 세계를 상징하는 레드 초침을 적용했다. 독재정부에 맞서 끝없이 전투를 벌이는 게임 속에서 밀리터리 워치 ‘카키필드’는 매우 적절한 아이템이다. 가상 세계와 현실 세계를 연결하는 매개물로 이보다 더 매력적인 것이 또 있을까.
초딩 시절 관광버스에서 카시오 게임 워치에 영혼을 빼앗긴 다음, 나는 머지않아 ‘게임 & 워치’라는 물건을 만나게 되었다. 그건 1980년 닌텐도에서 출시한 휴대용 게임기로, 오늘날 닌텐도 스위치의 기원이 된 제품이었다. 작은 수첩 사이즈인데도 ‘워치’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게임을 하지 않을 때 알람시계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 물론 나는 그 전자 제품으로 시간을 확인한 적은 거의 없었다.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을 하기 위한 물건이었고, 시계 기능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옵션에 불과했다.
지금 내가 소유한 여러 기계식 시계들도 본질은 비슷한 것 같다. 내게 시계는 정서적 쾌락과 재미를 위한 물건일 뿐 사실 시간을 확인한다는 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옵션이다. 내가 손목시계를 보는 건 시간을 확인하기 위한 행위가 아니라, 대부분 시계의 안부를 묻고 그 아름다움에 잠시나마 빠져들기 위한 행위다. 시계의 디자인과 디테일을 감상하다가 정작 시간 확인하는 걸 잊어버리기도 한다. 나에게 시계는 ‘게임 & 워치’이고 어쩌면, 그래서 ‘게임 = 워치’다. 우리는 게임에 빠져 있을 때 시계를 보지 않는다. 어느 소설 제목처럼 “행복한 사람은 시계를 보지 않는다.” 호모 루덴스인 나 역시 시계를 보지 않는다. 그저 시계 그 자체를 즐겁게 바라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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