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주 멈추는 시계는 아무래도 착용빈도가 떨어진다. 태그호이어 모나코는 셀리타 SW300 기반의 칼리버 11을 사용하는데, 내 컬렉션 중에서 지구력이 가장 떨어지는 녀석이다. 여유가 있을 때는 어떻게든 심폐소생술을 해서 살려내지만 출근 시간엔 전사자는 내버려두고 생존 병사 중 하나만 구출해서 빠져나온다. 반면 칼리버 P.5000을 탑재한 파네라이 루미노르 베이스 8데이즈 티타니오(PAM00562)는 8일 파워 리저브를 갖춰서 월요일마다 와인딩을 해주면 웬만해서 멈추는 일이 없다. 그래서 바쁜 아침에는 늘 섭외 1순위다. 모든 시계가 멈춰 있을 때도 거의 유일하게 심장이 뛰고 있는 녀석이라 다른 시계 시간을 맞출 때도 도움이 된다. 이런 경험이 누적되다 보니 시계를 구입할 땐 파워 리저브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다.
단지 시계의 작동 시간을 늘려주는 것뿐이지만 정확성을 유지하면서 이를 구현한다는 건 생각보다 까다로운 일이다. 리저브 타임이 늘어날수록 어려움은 가중된다. 그럼에도 각 브랜드가 파워 리저브 연장에 적극적인 것은 사용자의 체감 편의성과 직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정확성이라는 건 전문 장비로 측정해야 제대로 검증할 수 있고, 큰 오차만 아니라면 대체로 문제될 건 없다. 하지만 파워 리저브가 부족해 시계가 멈추면 여러모로 불편해진다. 특히 복잡한 캘린더 워치의 경우엔 이것저것 다시 세팅할 것이 많아서 불편함이 더 크게 다가온다.
개념적으로 접근하면, 파워 리저브는 메인 스프링이 완전히 감긴 상태에서 시계가 멈출 때까지의 시간을 의미한다. 리저브 타임이 길수록 멈추지 않고 오래 작동하는데, 이걸 늘리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메인 스프링의 길이를 연장하는 것으로, 주로 배럴의 크기를 키우거나 배럴의 개수를 늘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예를 들어 오트리브(Haute-Rive)의 오노리스 1(Honoris 1)은 메인 플레이트를 배럴처럼 사용해 1,00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며, 쇼파드의 L.U.C 콰트로는 두 쌍의 배럴을 병렬로 배치해 파워 리저브를 216시간으로 늘렸다. 다른 하나는 시계의 진동수를 낮추는 것이다. 티쏘의 파워매틱 80 무브먼트는 ETA2824의 4Hz 진동수를 3Hz로 낮춰서 약 8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확보했다.
사용자 입장에서 파워 리저브는 ‘롱롱익선(LongLong益善)’이다. 길면 길수록 좋다는 얘기다. 하지만 리저브 타임을 늘리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단순히 작동 시간만 늘리는 것이라면 정해진 공간 안에서 메인 스프링의 길이만 계속 늘려주면 된다. 손목만 허락한다면 1만 시간 파워 리저브도 이론상 불가능한 건 아니다. (착용할 수 있다고 장담은 못하겠다) 아니면 진동수를 극단적으로 낮추는 방법도 있을 거다. (시간이 정확하다고 장담은 못하겠다)
진동수를 낮추는 건 한계가 있기 때문에 대체로 롱 파워 리저브 워치를 설계할 때는 메인 스프링의 길이를 늘리는 방법을 사용한다. 문제는 메인 스프링이 길어질수록 균일한 힘(constant force)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풀 와인딩이 되어 있으면 강한 힘이 발생하고(진동각이 커지면서 시간이 느려진다), 메인 스프링이 거의 다 풀리면 힘이 약해진다(진동각이 작아져서 시간이 빨라진다) 즉 메인 스프링이 길어질수록 양 극단에 놓인 힘의 편차가 심해지면서 등시성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결국 오래 작동하면서도 일정한 토크와 정확성을 확보하는 것이 롱 파워 리저브 구현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기계식 시계의 파워 리저브는 약 40시간 정도다. 가장 널리 사용되는 ETA2824, ETA2892, ETA7750 같은 범용 무브먼트가 대부분 그 정도의 파워 리저브를 갖췄기 때문. 와인딩 없이 대략 2일 정도 버틸 수 있는데, 꾸준히 착용하는 오토매틱 시계라면 큰 불편함은 없다. 하지만 수동 시계라면 얘기가 다르다. 거의 매일 감아줘야 하고, 와인딩하는 걸 깜빡하면 시계가 멈춰버리기 일쑤다. 혹자는 그러면서 더 애정이 생긴다고 하지만 어쨌든 불편한 건 불편한 거다. 사실 파워 리저브에 예민한 사람들은 기계식 시계를 여러 개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리저브 타임이 짧은 시계는 다른 시계를 착용하는 동안 멈춰버릴 확률이 높으니까.
시계 시장이 성장하면서 요즘에는 60~8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쉽게 접할 수 있다. 이 수치는 주 5일 근무가 정착된 현대인들의 라이프스타일을 고려한 것이다. 토요일에도 열심히 일했던 내 아버지 세대는 40시간 파워 리저브로 충분했겠지만 금요일 저녁 ‘칼퇴근’해서 주말을 맞는 요즘 직장인에게는 애매한 성능이다. 그래서 브랜드에서는 파워 리저브를 강조할 때 언제나 이렇게 외친다. “주말 동안 시계를 벗어두어도 멈추지 않습니다!” 결국 60시간 이상의 파워 리저브는 토요일과 일요일을 견딜 수 있는 최소한의 수치를 의미한다. 이 정도 수치는 굳이 주말 핑계를 대지 않더라도 실생활에서 꽤 의미가 있다. 3~4개 정도의 시계를 보유하고 있다면(이 정도가 일반적인 애호가의 평균이라고 생각한다) 매일 다른 시계를 착용해도 거의 멈출 일이 없으니 말이다.
그렇다면 몇 시간 이상부터 ‘롱’ 파워 리저브 워치라고 부를 수 있을까? 공식적인 기준은 없지만 일반적인 시계의 파워 리저브가 40~80시간 정도이기 때문에 대체로 100시간 이상의 파워 리저브를 갖췄다면 롱 파워 리저브 워치로 분류해도 좋을 것이다. 사실 과거에는 80시간 정도면 꽤 긴 시간이었는데, 티쏘에서 파워매틱 80을 선보인 이후로는 80시간이 거의 표준이 되어버린 것 같다.
‘100시간 파워 리저브’라고 했을 때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블랑팡의 피프티 패덤즈 바티스카프 38mm 모델이다. 1992년 등장한 칼리버 1150은 3.25mm의 얇은 두께에 100시간(4일)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했는데, 당시로서는 굉장히 긴 파워 리저브였다.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상징하는 무브먼트 중 하나로, 지금도 블랑팡은 물론 브레게 등 스와치 그룹 일부 모델에 활용되고 있다. 단일 배럴을 사용했고, 진동수를 3Hz로 낮춰서 파워 리저브를 최대한 늘렸다. 핵 기능이 없다는 건 단점이지만 한편으로 이 무브먼트가 걸어온 시간을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진동수와 핵 기능이 아쉽다면 두께와 사이즈를 조금 키우면 된다. 피프티 패덤즈 42mm 모델이나 바티스카프 43mm 모델에 탑재되는 칼리버 1315는 4Hz의 표준 진동수에 3개의 메인스프링 배럴로 120시간(5일)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며, 핵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스와치의 라이벌 리치몬트 그룹에도 120시간 파워 리저브를 자랑하는 워크 호스가 있다. 그룹의 무브먼트 스페셜리스트 발플러리에가 생산하는 보매틱(baumatic)이다. 보메 메르시에의 클립턴, 리비에라 컬렉션의 데이트 모델에 주로 사용되는데, 한국에서는 아무래도 보매틱보다 이를 베이스로 제작한 IWC의 칼리버 32111이 더 익숙할 것 같다. 이 무브먼트는 현재 IWC의 마크 20과 인제니어의 엔진으로 사용되고 있다. 4Hz의 표준 진동수를 유지하면서도 단일 배럴로 안정적인 120시간 파워 리저브를 뽑아내는 게 인상적이다. 가격 접근성 측면에서도 블랑팡의 칼리버 1315보다 유리하다. 특히 마크 20은 120시간 파워 리저브의 오토매틱 워치에 접근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지 중 하나다.
칼리버 32111만으로도 일상생활에서는 충분히 넘치는 파워 리저브다. 하지만 IWC에서 롱 파워 리저브 워치를 고른다면 이보다 매력적인 무브먼트가 기다리고 있다. 바로 포르투기저 오토매틱 42에 장착되는 칼리버 52011이다. 2000년 밀레니엄과 함께 등장한 포르투기저 오토매틱은 ‘롱 파워 리저브’의 대표적인 고전이다. 인하우스 칼리버 5000을 탑재해 당시에는 보기 드문 7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했다. 5일과 7일의 차이는 단순히 2일의 차이로 환산되지 않는다. 일주일이라는 시간 단위는 꽤 상징성이 크니까. 이 시계는 3시 방향의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가 9시 방향의 스몰 세컨즈와 정확히 대칭을 이뤄서 국내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부엉이’라고도 불린다. 칼리버 5000은 원래 단일 배럴이었으나 이후 더블 배럴을 사용하는 칼리버 52010으로 업그레이드되면서 정확성과 안정성이 높아졌다. 현재는 52011로 레퍼런스 넘버가 바뀌면서 일부 개선이 이뤄졌다고 한다. 높은 효율을 자랑하는 양방향 펠라톤 와인딩 시스템까지 갖춰 손목에 착용했을 때 파워 리저브가 실시간으로 차오르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이제 같은 리치몬트 그룹의 파네라이로 건너가 보자. 롱 파워 리저브라면 여기도 포르투기저 못지않은 히스토리를 간직하고 있다. 파네라이의 롱 파워 리저브 역사는 195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파네라이는 8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안젤루스의 탁상시계용 무브먼트 SF240을 사용해 군용 다이버 워치를 제작했다. 긴 파워 리저브 덕분에 크라운 조작이 줄어들었고, 이는 내구성과 방수 성능의 향상으로 이어졌다. 이 헤리티지를 기념하기 위해 파네라이는 2005년 첫 인하우스 무브먼트 P.2002에 8일 파워 리저브 기능을 구현했다. 그리고 이를 사용해 루미노르 1950 8데이즈 GMT(PAM00233), 일명 ‘갓삼삼’ 모델을 발표했다. 이 타임피스는 3개의 배럴을 사용해 8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며, 수평 게이지 방식의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를 갖췄다. 최근 파네라이는 갓삼삼의 역사를 계승하는 루미노르 디에치 지오르니 GMT(PAM01482)와 루미노르 디에치 지오르니 GMT 세라미카(PAM01483) 모델을 선보이고 있다. 두 모델은 P.2003 오토매틱 칼리버를 탑재했고, 파워 리저브가 2일 추가되어 무려 10일 동안 심장이 박동한다. 다른 기능은 필요없고 오직 파워 리저브만 중요하다면 더 합리적인 대안이 있다. 루미노르 오토 지오르니(PAM00914)에는 P.2002를 단순화시킨 P.5000 무브먼트가 탑재되며, 2개의 배럴로 8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최근에는 크라운을 왼쪽에 배치한 루미노르 데스트로 오토 지오르니(PAM01655) 모델도 선택할 수 있다.
약 9일(216시간) 동안 작동하는 쇼파드의 L.U.C 콰트로 무브먼트는 브랜드의 첫 인하우스 칼리버 L.U.C 96.01-L에서 파생된 것이다. 1996년 등장한 칼리버 96.01-L은 마이크로 로터와 동축 트윈 배럴을 조합해 65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했다. 이를 기반으로 제작한 롱 파워 리저브 무브먼트가 바로 2000년 등장한 칼리버 L.U.C 98.01-L이다. 쇼파드는 기존 칼리버 L.U.C 96.01-L에서 마이크로 로터를 제거하고 그 자리에 또 하나의 동축 트윈 배럴을 추가했다. 그 결과 2000년에 총 4개의 배럴로 약 9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수동 무브먼트가 탄생했다. ‘콰트로’라는 이름은 이 4개의 배럴을 상징하며, 현재 L.U.C 콰트로 스피릿 25를 통해 만나볼 수 있다. 쇼파드 매뉴팩처 설립 25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칼리버 L.U.C 98.06-L 점핑 아워 무브먼트를 탑재해 약 192시간(8일)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이제부터는 자릿수가 달라진다. 가장 낮은 가격대에서 만날 수 있는 10일 파워 리저브 워치는 오리스의 빅 크라운 프로파일럿 X 칼리버 115 모델이다. 2014년 설립 110주년을 기념해 오리스는 인하우스 무브먼트 칼리버 110을 선보였다. 단일 배럴로 10일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무브먼트로, 이를 스켈레톤 버전으로 만든 것이 칼리버 115다. 스켈레톤 디자인 덕분에 커다란 싱글 배럴 안에 감춰진 메인 스프링을 비롯해 무브먼트 곳곳을 관찰할 수 있다. 스몰 세컨즈는 7시 30분 방향에 위치하며, 특허 받은 비선형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는 태엽을 다시 감아줄 시간이 다가올수록 보다 정밀하게 남아 있는 파워 비축량을 표시해준다. 최근 오리스는 2025년 뱀의 해를 맞아 리미티드 에디션도 선보였다. 다이얼은 청록색으로 표현했고,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의 핸즈는 뱀의 혀를 형상화했다.
좀 더 예산이 넉넉한 사람들에게는 위블로의 10일 파워 리저브 워치 빅뱅 메카-10이 준비되어 있다. 그동안 45mm의 큰 사이즈만 있어서 한국인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웠는데, 올해 LVMH 워치 위크에서 마침내 42mm의 빅뱅 메카-10이 등장했다. 2016년 첫 등장한 빅뱅 메카-10은 수평 형태의 직선 기어와 원형 기어를 조합한 독창적인 설계로 10일 파워 리저브를 구현했다. 새롭게 개발한 칼리버 HUB1205는 기존 메카-10 메커니즘을 보다 간결하게 리뉴얼하면서 사이즈를 줄이고 디자인 밸런스를 맞췄다.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를 3시 방향에 통합하고 무브먼트 구조를 개선해 심플하면서도 스켈레톤 디자인 특유의 개방감을 잘 살려냈다. 무엇보다 사이즈가 줄어들어 빅뱅 42mm 케이스에 완벽하게 들어간다.
위블로에서 10일 파워 리저브는 시작에 불과하다. 꽤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 여기서 4일을 더 추가할 수 있다. 칼리버 HUB9011을 탑재한 빅뱅 MP-11 파워리저브 14데이즈 워치다. 2018년 발표된 이 독특한 시계는 7개의 배럴을 원통 모양으로 길게 배열한 실린더 구조를 사용해 무려 14일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2주, 그러니까 한 달의 거의 절반을 와인딩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셈이다. 여러 개의 배럴을 사용하는 만큼 와인딩을 위해서는 전용 공구가 필요하다. 또 수직 배열된 배럴의 동력을 수평 방향 기어 트레인에 전달하기 위해 헬리컬 웜 기어(helical worm gear)라는 특별한 부품도 사용했다.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도 원통형 배럴과 붙어 있는 롤러 형태로 제작해 유니크하다. 지난 해 워치스 & 원더스에서 공개한 워터 블루 사파이어 버전은 투명한 얼음 안에 기계 장치가 얼어붙어 있는 듯한 모습이다. <겨울왕국>의 엘사가 착용하면 잘 어울릴 것 같다. 물론 그녀의 부러질 것 같은 손목이 지름 45mm의 케이스를 받아줄 수 있다면.
고전적인 스타일의 보베(Bovet) 워치에도 롱 파워 리저브 워치가 있다. 아마데오 플러리에 투르비용 브레이브하트(Amadeo Fleurier Tourbillon Braveheart). 어쩐지 1990년대 영화배우 멜 깁슨이 떠오르는 이름이다. 심장이 용감한지는 확인할 길이 없으나 오래 박동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22일 파워 리저브를 갖춰서 적어도 3주 이상 작동한다. 마치 허공에 떠 있는 듯한 투르비용 케이지에는 원통형 헤어스프링, 3개의 축으로 구성된 밸런스 휠 등 특허 받은 기술이 가득하다. 시계는 앞면과 뒷면 양방향으로 착용 가능하며, 손목시계 형태에서 회중시계 형태로 바꿔서 착용할 수도 있다. 앞면과 뒷면 각각 다른 방식으로 시간을 표시하는데,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는 뒷면에서 확인 가능하다.
오래, 그리고 멀리 왔다. 드디어 한 달 동안 작동하는 기계식 시계다. 그 이름도 랑에 31. 누구나 파워 리저브 시간을 알 수 있는 직관적인 작명이다. 랑에 운트 죄네의 칼리버 L034.1은 2개의 배럴로 744시간의 엄청난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이 정도의 롱 파워 리저브를 구현하려면 메인 스프링에 많은 양의 에너지를 저장할 수 있어야 한다. 시계는 길이 1,850mm에 달하는 두 개의 메인 스프링으로 제어되며, 이는 일반적인 기계식 시계보다 10배 더 긴 수치다. 또 비축한 많은 에너지를 균일하게 전달하기 위해 특허 받은 콘스탄트 포스 이스케이프먼트를 개발·적용했다. 메인 스프링 길이가 길어서 와인딩 시간도 오래 걸리는데, 이 문제는 키 와인딩 시스템을 사용해 해결했다. 롱 파워 리저브 기능을 하이 컴플리케이션 영역으로 끌어올린 기념비적인 작품.
랑에 운트 죄네의 31일 파워 리저브는 ‘한 달’이라는 상징적인 시간 단위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744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또 다른 도전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조금만 더 늘리면 1,000시간이니까. (물론 조금만 더 늘린다는 건 어폐가 있다. 무려 256시간을 더해야 하니 말이다) 레벨리온의 T-1000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1000시간(약 41일)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는 시계다. 칼리버 REB T-1000은 전통적인 무브먼트와 전혀 다른 디자인을 갖췄다. 무브먼트 양쪽으로 수직 정렬된 6개의 배럴이 있는데, 케이스 측면의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를 통해 배럴, 기어, 체인 등의 부품을 확인할 수 있다. 케이스에 부착된 커다란 레버를 당겨서 와인딩을 수행하며, 무브먼트 양쪽에 위치한 2개의 체인 부품으로 6개의 배럴을 동시에 회전시켜서 필요한 에너지를 빠르게 확보할 수 있다. 2개의 롤러가 서로 반대 방향으로 회전하면서 시와 분을 표시한다.
레벨리온의 T-1000은 마치 미래에서 타임머신을 타고 온 듯한 전위적인 디자인이다. 이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동일한 파워 리저브에 좀 더 고전적인 스타일도 있다. 바로 오트리브의 오노리스 1. 오트리브는 율리스 나르덴의 전 기술 책임자가 설립한 브랜드로 오노리스 1은 이들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6개의 배럴로 작동하는 레벨리온의 T-1000과 달리 오트리브의 오노리스 1은 오직 1개의 배럴로 1000시간의 파워 리저브를 구현한다. 단일 배럴 기준으로는 가장 긴 파워 리저브다. 메인 스프링 길이만 3m에 달하는데, 베이스 플레이트 전체를 배럴로 활용하며, 와인딩에 필요한 토크를 확보하기 위해 크라운이 아닌 베젤을 돌리는 방식을 사용한다. 몇몇 레퍼런스에 플루티드 베젤을 적용한 이유이기도 한데, 어쩐지 율리스 나르덴의 프릭(Freak)이 살짝 겹쳐진다. 브랜드 설립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부분. 시간 설정을 위해 푸셔와 컬럼 휠을 사용하는 것도 유니크하다. 큼직한 휠을 활용한 파워 리저브 인디케이터가 케이스 백을 가득 채운다.
MP-05 라페라리는 롱 파워 리저브의 사실상 끝판왕이다. 위블로가 2013년 페라리와의 파트너십을 기념해 선보인 모델로, 3Hz의 주파수로 1,200시간(50일)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한다. 중앙에 11개의 배럴이 원통형으로 수직 배열되어 있으며, 하단에 버티컬 투르비용 케이지, 좌우에 각종 인디케이터가 위치하여 시계 전체가 마치 슈퍼 카의 엔진 룸처럼 디자인되었다. 시간은 우측에 위치한 2개의 롤러로 표시하며, 좌측에 위치한 2개의 롤러는 각각 파워 리저브와 초를 표시한다. 엄청난 파워 리저브를 자랑하는 만큼 와인딩은 전용 전동 공구를 사용하는데, 마치 모터 레이싱에서 타이어를 교체하는 피트-스톱을 연상시킨다. 2024년 위블로 매뉴팩처 방문 당시 핑크 사파이어 버전 MP-05를 잠시 만져볼 수 있었는데, 전용 공구로 와인딩했던 짜릿한 감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벌써 출시된 지 10년이 지났지만 여전히 디자인과 상징성,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는 위블로의 대표 플래그십 모델이다.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했다. 이제 진짜 마지막이다. 조금 의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이 분야의 대미를 장식하는 건 바쉐론 콘스탄틴의 캐주얼한 드레스 워치다. 트레디셔널 트윈 비트 퍼페추얼 캘린더는 스펙상으로 65일의 파워 리저브를 갖췄다. 하지만 여기에는 숨겨진 트릭이 있다. 시계를 사용하지 않을 때 진동수를 극단적으로 낮추는 방식으로 파워 리저브를 늘리기 때문. 칼리버 3610QP는 5Hz 주파수의 액티브 모드와 1.2Hz 주파수의 스탠바이 모드를 사용자가 임의로 선택할 수 있다. 5Hz의 액티브 모드에서는 4일간의 파워 리저브를 제공하지만 1.2Hz의 스탠바이 모드로 전환하면 무려 65일까지 연장할 수 있다. 물론 스탠바이 모드에서는 시계를 사용할 수 없다. 살짝 반칙처럼 보이지만 어쨌거나 파워를 보존한다는 관점에서 현재까지 출시된 기계식 손목시계 중 가장 긴 파워 리저브를 자랑한다. 특히 퍼페추얼 캘린더 컴플리케이션을 장시간 멈추지 않게 해준다는 점이 돋보인다.
파워 리저브가 길면 어쨌든 꽤 편하고 유용하다. 시계가 멈출 때마다 다시 태엽을 감고, 시간을 맞춰야 하는 수고를 덜어주니까. 하지만 우리가 굳이 파워 리저브를 따져가며 기계식 시계를 구입하는 이유는 이런 편의성 너머에 있다. 단지 편한 것을 추구한다면 쿼츠 시계를 사면 그만이다. 배터리를 다 쓸 때까지 멈추지 않을 테니 2년만 작동한다고 해도 1만 7,520시간의 파워 리저브다. 티쏘 PRC 100 솔라 워치처럼 태양광으로 충전하는 시계라면 10만 시간 이상도 가능할 거다. 기계식 시계가 감히 명함도 내밀지 못할 기술의 세계다. 내가 기계식 시계를 좋아하는 건 역설적으로 그것이 멈추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는 언젠가 멈춘다. 거기엔 예외가 없다. 시계도, 그리고 당신도. 하지만 일상에서 우리가 이 사실을 마주할 기회는 많지 않다. 지금 당장의 삶을 위해 애써 외면한다. 기계식 시계는 우리가 언젠가 멈출 수 있다는, 그 당연한 진리를 일깨워준다. 인간의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우리 모두는 비교적 롱 파워 리저브 생명체다. 다만 멈추면 다시 메인 스프링을 감아줄 수 없다는 걸 늘 기억하자. 메멘토 모리!
로그인하거나 가입하여 댓글을 남겨주세요.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